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작 뉴턴 (문단 편집) === 사과에 관한 일화 === [[페스트]]가 [[런던]]에 퍼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피난하던 시기 ^^(1664년 ~ 1666년)^^의 산책 중에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더 나아가서 왜 달은 사과와 달리 안 떨어질까를 생각했다고도 한다.]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여기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프린키피아]] 원문에 [[사과나무]] 언급이 있고 인생 말년에 떨어지는 사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뉴턴 본인이 직접 언급한 바가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이론적 영감을 받았는지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갈릴레오나 케플러 등의 다른 학자들의 연구를 접한 것이 중력의 발견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게 통설이다. 고향으로 돌아간 시기에는 오히려 케임브리지의 도서관을 이용하지 못해 중력에 대한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도 [[사과나무]] 언급이 프린키피아 원문에도 실려있고 사과나무 이야기를 뉴턴이 직접 말한 것도 사실이기도 해서, 그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까지는 하지 않는다. 실제로 뉴턴의 전기 작가이자 동시대인이었던 윌리엄 스터클리는 1726년 4월 15일에 뉴턴이 사과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뉴턴에 대한 그의 전기에 썼다. 또한 1727년에 뉴턴이 [[왕립학회]]장이었을 당시 부원장이었고, 후에 원장이 된 마틴 포커스(Martin Folkes)가 후에 전한 말을 토대로하여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이라는 사람은 이에 대해 상당히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Westfall, Richard S. “Chapter 5, Anni Mirabiles.” Never at Rest: A Biography of Isaac Newt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10.] 역사적으로 보면 [[볼테르]]가 사과 이야기로 뉴턴을 칭송한 것이 널리 퍼지면서 일종의 전설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볼테르가 영국 유학을 갔을 때 뉴턴의 질녀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사과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볼테르는 당대 가장 유명한 계몽사상가이자 작가였는데, 볼테르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의 책에 거듭 소개함으로써, 사과 일화는 순식간에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고 뉴턴을 대표하는 일화로 등극했던 것.[* "그는 아마 이 이야기를 뉴턴의 질녀에게서 들은 듯한데,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것이 중력에 대한 뉴턴의 설명이 지닌 명쾌한 단순성을 표현하기에 완벽한 소재라는 점을 깨달았다. 볼테르는 이 이야기를 1727년 『고찰』에 처음 썼고 『편지』에 다시 삽입했다." (니컬러스 크롱크 『인간 볼테르』 후마니타스. 2020. p.58)] 사과 이야기가 진짜 사실이든 아니면 뉴턴이 말년에 창작해낸 이야기든 간에, [[만유인력]]과 사과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져서 이제는 진위 여부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지긴 했다. 심지어 그의 모친의 자택에 있던 사과나무를 여러 번 옮겨 심은 사과나무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기증받아 심어져 있다. 국내에만 11곳 이상에 심겨졌으며[* 다만 일부는 고사했다.] 접목이므로 종자는 원본과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참고로 원본 나무도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다.''' [[https://www.nationaltrust.org.uk/woolsthorpe-manor/features/the-story-of-our-apple-tree-at-woolsthorpe-manor|링크]][* 다만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니고, 1820년에 한 번 쓰러졌다가 남은 뿌리에서 다시 자란 것이 현재의 모습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